나는 온몸이 서랍인 여자를 알고 있다
그녀를 만지면
거짓말처럼 서랍이 열린다 스르르
가슴엔 먼 해를 좇던 눈 눈 눈 그 눈을 보면
희망이란 이름의 배들이
얼마나 그녀를 기만했는지 알 수 있다
하늘엔 붉은 회오리바람이 일고
검은 바다엔 끊임없이 배들이 밀려가고 밀려온다
그녀의 머리를 만지면
로쟈의 독백이
라스꼴리니꼬프의 피 묻은 도끼가 튀어나온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저 쾡한 눈
그러나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다
그녀의 팔을 열면
그녀의 첫 남자가 누워 있다
가슴에 질퍽이는 땀
도드라진 결핵이
붉은 꽃을 피우고 도대체 말이 없다
어느덧 그녀의 어깨 위에 석양이 흐른다
강가의 작은 돌 몇 개
마른 가지 위에 걸린 냄비
새까만 그을음이 지문처럼 묻어 있다
그녀가 숨 쉴 때마다 열리는
손톱 끝의 작은 서랍들
끝내 닫혀지지 않는 서랍 속에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 하나
깜빡이며
밤마다 서랍 속으로
사라지는 여자를 나는 알고 있다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면 여자는 서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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