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225

가을 편지 / 이해인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 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 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2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싱싱한 마음으로 ..

문학 2023.09.17

천의 아리랑 / 김승희

1. 가슴속의 피아노 누구나 한 번은 떨어지고 싶어 한강으로 간다 가슴에 검은 피아노 한 대를 질질 끌고 한강 다리를 취중 횡단 야 이 미친년(놈)아 너 죽고 싶어 흠뻑 쌍욕을 먹어본 적이 있다 죽고 싶으면 저나 혼자, 환장 뒤통수에 따라오는 빛나는 쌍욕의 훈장을 끌고 강가에 서면 그런 떨어지는 것들이 모두 모여 강물이 숨을 쉰다 이렇게 많은 피아노들이 한강에 떨어졌는가 달을 주렁주렁 매달고 미친 피아노들이 숨을 쉰다 강물은 숨결 숨결은 이야기 누군가의 숨결 산맥의 이야기 오늘 밤에도 누군가 한강 물 속에서 녹슬고 부서진 벅찬 피아노의 탄식을 듣는다 사랑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이 너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을 알아보는 것이다 1890년대 후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네..

문학 2023.04.17

그림자

+ 그림자 허공에 한껏 부풀려진 제 영혼을 위하여 그림자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드러눕습니다 모양과 부피가 각기 달라도 영혼의 두께는 다 같은 법이라고 모든 존재의 뒷모습을 납작하게 펼쳐놓습니다 높이만을 최고로 알고 중력과 싸우느라 버둥거릴 때도 소리 없이 바닥으로 내려와 높을수록 커지는 위험을 길이로 재어줍니다 알록달록한 꿈 자랑하며 휘날릴 때 화려한 빛깔들을 가장 단순한 색으로 바꿔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품는 쉼터가 되어 줍니다 감당 못할 무슨 일로 풀죽은 저녁 무렵이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며 지평선 끝까지 키를 늘이고 어깨 다독입니다 해를 쳐다보는 동안에는 못 보지만 방향을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가까운 곳에서 해로 하여 가려진 세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평생 곁에 머물러 날 지켜주다가 ..

문학 2023.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