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봄은 암만해도 희망인거 같다..

하농17 2016. 3. 22. 10:37




(비오던 봄날의 오후 / 걷던 길에서.. )



+ 봄 편지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순서


맨 처음 마당가에
매화가
혼자서 꽃을 피우더니

마을회관 앞에서
산수유나무가
노란 기침을 해댄다

그 다음에는
밭둑의
조팝나무가
튀밥처럼 하얀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에는
뒷집 우물가
앵두나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피어나고

그 다음에는
재 너머 사과밭
사과나무가
따복따복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사과밭 울타리
탱자꽃이
나도 질세라, 핀다

한 번도
꽃 피는 순서
어긴 적 없이

펑펑
팡팡
봄꽃은 핀다

 
(안도현·시인, 1961-)






+ 그대 생의 솔숲에서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김용택·시인, 1948-)






+ 봄날과 시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나해철·의사 시인,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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