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천의 아리랑 / 김승희

하농17 2023. 4. 17. 10:37

 

1. 가슴속의 피아노

 

누구나 한 번은 떨어지고 싶어 한강으로 간다

가슴에 검은 피아노 한 대를 질질 끌고

한강 다리를 취중 횡단

야 이 미친년(놈)아 너 죽고 싶어

흠뻑 쌍욕을 먹어본 적이 있다

죽고 싶으면 저나 혼자, 환장

뒤통수에 따라오는 빛나는 쌍욕의 훈장을 끌고 강가에 서면

 

그런 떨어지는 것들이 모두 모여 강물이 숨을 쉰다

이렇게 많은 피아노들이 한강에 떨어졌는가

달을 주렁주렁 매달고 미친 피아노들이 숨을 쉰다

강물은 숨결 숨결은 이야기 누군가의 숨결 산맥의 이야기

오늘 밤에도 누군가

한강 물 속에서 녹슬고 부서진 벅찬 피아노의 탄식을 듣는다

 

사랑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이

너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을 알아보는 것이다

1890년대 후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네 번의 조선 여행중에 알아보았다

조선 백성들의 존재 이유는

오직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들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뿐이라고

아리랑이 있었고 아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요

서로 가시를 내밀어 부비며 쑤시며 마구 찔렀어도

다만 흘러내리는 피가 더웠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너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이

나의 가슴 안에 있는 아리랑을 만났을 때

모든 피아노에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이 있듯

생소하지가 않아서 혈연처럼 참회처럼

온갖 독극물과 피와 쥐약과 정액에 시체 방부제까지 섞인

더러운 한강 물 속으로 뛰어들려가다

잠시 멈춰

네 가슴의 녹슨 피아노를 손으로 어루만지듯

미친 아리랑을 피아간에 아득하게 들어주는 것이다

 

 

2. 부용산

 

장사익의 찔레꽃이나

이애주의 부용산이나

그런 노래 듣고 있을 때

일천 개의 가을 산이 다가오다가

일천 개의 가을 산이 무너지더라도

13월의 태양처럼

세상을 한번 산 위로 들었다 놓은 마음

 

노래가 뭐냐

마음이 세상에 나오면 노래가 된다는

장사익의 말

그래서 아리랑이 나왔지

하얀 꽃 찔레꽃 찔러 찔려가며

그래서 나왔지. 찔리다 못해 그만 둥그래진 아리랑이

둥그래진 멍그래진

찔렸지 울었지 그래 목 놓아 울면서 흘러가노라

 

장시익의 찔레꽃이나

이애주의 부용산이나

그렇게 한번 세상을 산 위로 들었다 놓는 마음

13월의 태양 아래

찔레꽃 장미꽃 호랑가시 꽃나무가

연한 호박손이 되고 꽃순이 되고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로 날아갈 때까지

마음이 마구 세상에 흘러나오고 싶은 그 순간까지

숨을 참고 기다리다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런 아리랑

 

 

3. 론도 카프리치오소

 

피를 팔아 산 피아노의 이야기와

피를 팔아 산 피아노가 밥이 된 이야기와

피를 팔아 산 쌀이 밥이 되었다가 똥이 된 이야기와

그런 똥과 오줌이 또 내 피가 된 그런 이야기

피아노에 묻은 피 그런저런 이야기들이

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돌 속의 물고기와

빙하 속의 물고기와

청산가리 속의 물고기여

5.18 부상자 중 10%는 자살이요

자살이라네

가자 가자 흘러가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

델마와 루이스가 영화 마지막에 차를 몰로 투신하던

그 절벽

그 절벽의 분홍색 흙의 빛깔 극락의 빛깔

그래도키니언도 먼 옛날엔 바다 밑에 있었다

어떻게 해 그렇게 아름다운 빛깔을 얻었다

그렇게 갑자기 바다 속의 피아노가

피 묻은 가슴으로 산 위에 우뚝 솟았다

 

물속의 피아노가 갑자기

산 위의 피아노가 되는 날

갑자기 절벽의 이야기가 되는 날, 솟구쳐

돌 속의 물고기와 빙하 속의 물고기와

청산가리 속의 물고기가

다 같이 함께 만세 부르며

푸르른 하늘 밑에 분홍색 극락으로 푸르러 푸르러

 

 

4. 배고픈 승냥이의 노래

 

어디야 어디야

명사계 어디야

어디야 정말 명사계 어디야

누구야 정말 응 어디 가야 어디 가야

거울이 원죄야 이름이 원죄야 아니 다

밥이 원수야 꿈이 원수야

 

오늘도 그냥 일용할 고통이

쓰레기 같은 거울 산을 이루고

거울 앞에 나를 세워놓고 부려먹고 부려먹고 또 부려먹고

이 산 너머 가면 명사계 있냐고

저 산 너머 가면 명사계 있냐고

거울 뒤로 가야 명사계 나오냐고

태산 같은 땀과 태산 같은 피 흘리며

명사계가 어디냐고

어디가야 우리 어머니 만나요

어디 가야 내 사랑 다시 만나요

어디 가야 해와 달 함께 만나요

 

 

5. 밥의 아리랑

 

용산이나 마포 밥집이 많은 거리로 올라가

밥을 먹는다

곡기를 끊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땅을 쳐야 할 상황인데도

무심하지 않으면 하늘이 아니지 의젓하게

혼자서 밥을 먹는다

아리랑의 밥이다 아니 물에 만 밥 같은 것

얼굴에서 얼이 다 빠지니

굴만 남았다

 

굴 속으로 설렁탕 국물이 막 흘러들어간다

생판 첨 비가 너무 많이 와

얼이 다 뼈져수다

괜히 제주 방언을 말해본다

부담 주기 싫다며

허리에 돌 24kg을 묶고

자기 집 우물 속으로 몸을 던져

빠져 죽은 어느 할머니가 있다

첩첩 굴 속에서 정선 아리랑이

설렁탕 국물을 따라 아련히 휘돌아든다

윤무

뱃속으로 휘돌아드는 노래가 있다

얼이 다 뼈져수다 의젓하게

얼이 빠진 굴을 들고 앉아

거울 너머 창자 속으로 흘러가는 아리랑을 바라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무심하지 않으면 하늘이 아니지

설렁탕 국물이 아련히 창자 굽이를 휘돌아든다

그 노래가 쓰리다

 

 

6. 흙의 아리랑

 

어쩌다 하늘 공원까지 왔어요

하얗게 머리 풀고 흔들리는 망초꽃 홀씨와 억새들

저 스스로 왔다가 저 홀로 물결처럼 흔들려요

그때는 사랑인 줄 모르고

발버둥 치며 지나간 시간들

구름에 목을 걸고 살아요

구름이 흔들리면 온몸이 나부껴요

밥줄이란

목에서 위까지 걸려 있는

그 줄이래요

밥이 법이다

그런 말은 싫은데

몸의 한가운데 흉곡에 피아노 철사줄이 흔들거릴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목구멍 속으로 울부짖는 피아노가

터져나오려고 해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할머니도 그렇게 아팠을 거예요

흙이 불러요

산이 불러요

물과 바람이 불러요

막 불러요, 뿌리쳐도 불러요

소리치며 불러요, 휘몰아치며 불러요

흙이 그리워져요

흙이 향기로워져요

흙 솔에 기억들이 빛나요

할머니

흙이 막 날아와요

흙 묻은 억새 풀잎들이 마구 휘몰아쳐

얼굴을 덮으며 날아와요

흙에도 날개가 뻗치는 그런 날이 있나 봐요

그런 날

흙이 시집이예요

흙이 전기(傳記)예요

흙이 자서전이예요

흙보다 더 아름다운 책은 없는 듯해요

그러고 보니 할머니 할머니란 말 속에 흙이 들어 있네요

흙은 여인들의 아리랑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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