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나 아닌 모두가 너란 것을..

하농17 2019. 10. 17. 10:37






양 날아와 가슴엔 듯 내려앉기까지의
아득했을 거리를 너라고 부른다

기러기 한 떼를 다 날려보낸 뒤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저처럼의 하늘을 너라고 여긴다

그날부턴 당신의 등뒤로 바라보이던 한참의 배후를
너라고 느낀다

 

더는 기다리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서고야 만
이 아침의 먼 길을 너라고 한다

직지사가 바라보이던 담장 앞까지 왔다가 그 앞에서
돌아선 어느 하룻날의 사연을 너라고 믿는다

생이 한 번쯤은 더 이상 직진할 수 없는 모퉁이를 도는 동안
네가 있는 시간 속으로만 내가 있어도 되는

마음의 이런 순간을 너라고 이름 붙여주고 나면
불현듯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라곤 사라져버려선

사방에서 사방으로 눈이라도 멀 것만 같은
이 저녁의 황홀을 너라고 쓰기로 한다


너라고 쓴다 / 정윤천


 





신경숙이었던가요
 속말들은 내보일수록 후련해지는 게 아니라
초라해져 버린다고 했던

비워버리자 비웠다 해도
뒤돌아보면
켜켜이 쌓여 있는 것들
잊자 잊어버리자
시속 150km로 달렸어도
비웃는 거처럼 또렷해지는 것들

그 아득한 거리
그 줄지 않던 하늘
그 한참의 배후
더 이상은 직진할 수 없는 모퉁이 모퉁이

직지사가 바라보이던 담장 앞에서
돌아서야만 했던 자
그건 너와 나 우리 모두의 모습이겠지요

그럼에도 황홀했노라고
때때로 느낄 수 있을까
감사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이 너였고
너이며
너일 거라고
또 하룻날의 사연을
너라고 엮어갈 수 있을까






늘 배회하는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내 자리에서 
초점 잃은 밀랍처럼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려오던 세월 속에
묻혀버린 어느 날들이 훌쩍 지나가면

어느 날
아.. 하는 감탄사와 자신이 도인이 된 양
세상사에 대해
깨달아지는 날들이 생기지요

그러면서 감탄합니다
나는 너무 괜찮은 이라고
이렇게 이겨내면 살아가는 거라고

또 아닙니다
그 순간은 잠시뿐
그 자리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어느덧 그 흔적 속으로 파고듭니다 

세상의 길목에서
길의 끝에서 다다르는 아득함
가슴에서 떨어져 나가던
 아릿해오던 순간들

 
밀려 왔다 밀려가는 은빛 파도소리의 끝맺음처럼
철렁 내려앉던 시린 순간순간들
외면하려 돌아서려 했던 내 방어의 벽들

모퉁이 모퉁이
돌아 돌아 나오면
또 다른 모퉁이가 나를 마주하고

인생이
삶의 연속이
길목 끝의 긴 곡예는 아닌지
터널이라는 작은 공간 하나 만들어 
빈 허공 끌어안으면 살다 가는 거는 아닌지

흔적이 끊기어진
절간 터 찾아가
바윗돌 같이 짓누르던 씁쓸하던 순간들
내려놓지 못하고
돌아서 돌아서야 했던 순간들

무엇을 안고
무엇을 버려야 되는지를

나 아닌 모두가 너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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