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을 기리는 서원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으로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이었던 것을
선조 5년(1572)에 류성룡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겼다
1607년 류성룡이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유림이 뜻을 모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다
인조 9년(1629)에는 셋째 아들 수암 류진을 추가로 배향했으며
철종 14년(1863) 임금으로부터 ‘병산(屛山)’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에 각각 다시 지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고종 5년(1868)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보호되었다
강학공간인 복례문, 만대루, 동서재, 입교당, 장판각, 제향공간인 신문, 존덕사, 전사청 등의 건물이 있다
조선 중기 서원정신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등의
초창기 서원건축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여 지은 건물로 한국건축사에서 의미가 큰 유적이다
류성룡의 업적
류성룡은 본관이 풍산으로 명종 19년(1564) 사마시를 거쳐
도승지,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제찰사로서 군무를 총괄하고
그 후 영의정이 되어서는 성곽 수축 화기 제작을 비롯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또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선조 31년(1598) 북인들의 탄핵으로 한때 관직을 삭탈당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서해집> <징비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 문장, 덕행,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지역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상세설명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