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상처가 스민다는 것 / 강미정

하농17 2012. 6. 7. 10:37

 

 

                   

        


 

서두를 것 없이 사흘 동안 비 내렸다 

 빗길 그 사이에 점자처럼 도드라져 있는 
 파릇한 상처를 밀어 올리며 당신 꽃피었다

숲과 나무가 천천히 스미듯 땅과 비가 천천히 스미듯
젖는 일이란 제 속의 마디를 끊어내는 일이었다 
제 속으로 새 마디를 하나 새겨 넣는 일이었다

 

 

당신이 내게 소리 없이 스미어왔던 것처럼 
내게 스미어 내가 모르게 된 것처럼 
천천히 스미기 직전의 수만 떨림의 촉수를 뻗었던
누군가가 내 인생에도 있었음을 알겠다

가슴 속 상처가 스민 그 자리에서 
길을 더디게 걷는 일처럼 
소리도 없이 서로 스미려고 
그 얼마나 비오고 바람이 불었는지
몇 날 비 젖고 있는 창 밖의 풍경처럼 
적조하고 단조로운 음절도 때론 사무친다는

 

 

어느 사랑이 비의 경전에 귀기울이며

젖는 일에 저토록 몰두할 수 있단 말인가 

창 밖의 풍경은 또 훌쩍 키가 자라고 

마디진 길을 배회하던 기다림은 더 푸르러지려니
당신을 새겨 넣은 내 푸른 상처는 

또 얼마나 오래도록 파닥이며 반짝이겠는가

빗물 다 스민 자리에서 나무는 또 

푸른 물기 스민 잎을 햇빛 속에 가득 새겨 놓는다..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색 / 최문자  (0) 2012.06.12
행복  (0) 2012.06.11
법정 스님 1주기 추모 사진  (0) 2012.06.05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0) 2012.05.30
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 이기철  (0) 201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