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수평선너머 / 함석헌

하농17 2013. 3. 4. 10:37

 

 


(오륙도에서 이기대까지.. )

 

 

바다
  넓이 끝없이 까만
  깊이 한없이 아득한
  바다 또 바다
  저 바다 너머는 또 무엇이 있나

  물결
  앞에도 앞에도 푸른 푸른
  옆에도 옆에도 하얀 하얀
  물결 또 물결
  저 물결 뒤에는 또 무엇이 있나

  소리 
  하늘 울어 천둥
  땅 울어 지둥
  흔들고 뒤흔드는
  저 소리는 누가 흔드는 소리인가

  바다 아닌 바다
  물결 아닌 물결
  바람 아닌 바람
  소리 아닌 소리
  거기가 가고파서 그리워서

  울부르느냐
  흔드느냐
  들이치느냐
  떠서 도느냐
  이소리 이 바람 이 물결 이 바다


  논다
  늠실 늠실
  우으로 우으로 늠씰 늠씰
  아래로 아래로 흠씰 흠씰
  그저 늠실거려 논다

  노했다
  밀려온다 밀려온다 온다 온다
  철석 철서덕 쾅
  나간다 나간다 간다 간다
  한숨 내쉤다 부스스스 거품 거품

 

싸운다 싸운다
  또 들어온다
  또 나간다
  들어오다 나가다 나가다 들어오다
  와아 솨아 출렁 철렁


 

 

 

밤낮으로 쉴새없이 우는 바다
  밤낮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흔드는 바다
  밤과 낮으로 눈코 뜰 겨를 없이 들이치는 물결
  밤낮을 아우성을 치는 물결
  너는 무엇이 분하니 무엇이 노여우니

  이쪽엔 일고 꺼지는 有의 물결
  아득 아득한 수평선
  저쪽엔 죽은 듯 막막한 無의 모래밭
  뽀얀 뽀얀 地平線
  수평선 지평선을 내다보는 그 가운데 天平線

  그 서품에
  그 바다와 모래밭 만나는 사이
  그 有와 그 無 갈라지는 짬
  그 싸움의 오고 가는 틈
  그 늘 싸우건만 이김도 짐도 없는 선 위에

  늘 들이치건만
  더 얻음도 없는 선
  늘 흘러 나건만
  빠져남도 없는 선
  늘 늘 변하면서 변함 없는 선 아닌 선

  얼마나 많은 물결 거기서 부서진
  얼마나 많은 거품 거기서 꺼진
  얼마나 많은 모래 거기서 묻힌
  얼마나 많은 발자국 났다가 사라진
  얼마나 많은 배 거기서 떠난

  수없이 많은 그림 여기서 그려진
  수없이 많은 음악 여기서 울린
  수없이 많은 진주 여기서 닦여난
  수없이 많은 얼굴 잃었다 만난
  수없이 많은 배 여기 와 닿던

  그 선 위에
  그 서품에
  한 형상 섰네
  어부 아닌 어부
  호올로 서 있네

  발 밑에 설레는 물결
  삼키려 함 모르는 듯
  머리 위 휘도는 모래바람
  덮치려 함 모르는 듯
  바위처럼 서는 그 사람

  바닷바람에 찢기고 익히운
  그 살 그 힘줄
  소금 모래에 타고 깎이운
  그 이마 그 뺨
  싸움의 기록을 그린 그 얼굴

  익어 떨어지는 밤알인 듯
  붉고 검건만
  저녁 영광 속에 빛나
  황금옷 입은 천사인 듯
  화평과 엄숙의 빛 띠어 있고

 

 

 

 

 

 

바람결에 나부끼는
  굽실굽실한 머리카락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자유의 기상 떠도는 속에
  한 줄기 슬픔 숨음 드러냈네

  숲 속에 미끼 얻어본
  독수리 눈인 듯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그 눈
  또 갈라지는 애인들의 그것같이
  애탐을 호소하는 그 눈

  아득한 바다 끝의 한 점
  깜짝 않고 바라고 바라다가
  눈물 어릴 때마다
  두툴한 그 주먹 들어
  닦으며 바라보았네

  바라다 바라다 못해
  소식 없어
  두 손 말아 나발 만들어
  거친 수염 헤치고 입에 댄 후
  소리쳐 부른다

  발꿈치 까꾸러지게 괴어
  발끝으로 서고
  목 빠지도록 내빼어
  수평선 너머 건너다보며
  어어이 어어이

  외치고 외치건만
  하늘 땅 뒤흔드는 아우성 속에
  그 소리가 무어냐
  구름 물 맞닿는 멀고 먼 데
  그 소리가 무어냐

  외친 그 소리
  한 걸음을 못 나가
  발 앞의 사나운 물결
  거품 문 입에
  다 삼켜버린 듯컨만

  안타까운 가슴 앞에
  영원인들 그 무어냐
  무한인들 그 무어냐
  굽힐 줄 모르는 맘
  부르고 또 불렀다

  목에 핏대 팔뚝같이 돋고
  배는 대장장이의 가죽 풍군 듯
  뱃겨 쳐 불며 불며
  열 두 고비 마지막 끝에서 울려대는 소리
  어어이 어어이

  천지는 무정하건만
  그 강剛엔 못 견디었나
  천지 유정해 그 성誠에 감동돼
  한 때를 빌렸나
  요란하던 세계에 이는 또 무슨 일인가

  바람 쉬고
  물결 자고
  소리 죽고
  바다 잔잔해
  천지는 잠쪽 고요해졌네

 

 

 

 

 

 

이 일순
  이 고요한 일순
  이 눅어진 일순
  하늘 땅 사라져간 곳을 모르고
  有無는 녹아들어 한 빛뿐이더라

  찰나
  모든 힘이 치륜齒輪이 멎는 시간
  우주가 숨을 쉬는 시간
  들어간 숨이 아직 나오기 전
  나는 숨 채 들어가기 전

  호呼도 아닌
  흡吸도 아닌
  생生도 아닌
  사死도 아닌
  순간에도 차지 못할 찰나

  이 일찰나
  모든 동정 다 사라져 없고
  모든 적의敵意도 다 물러가 없고
  주관 객관 싸움도 없고
  무한을 단번에 만지는 찰나

  오직 하나 때만
  오직 하나 숨만
  오직 하나 삶만
  오직 하나 뜻만
  오직 하나 하나만

  하나만인 그 찰나에
  모든 것이 다 죽은 시간
  부르다 부르다 끊어진
  바드득 쥐어짜 부른 끊어진 소리만
  거칠 것이 없이 뚫고 달았다

  물 위로
  바람 위로
  구름을 뚫고
  하늘을 뚫고
  저 건너로 저 밖으로

  들렸나 아니 들렸나
  어디로 갔나
  하늘 땅은 알 리도 없고
  부른 제 맘만이
  안다면 오직 홀로 알 소식

  부르기를 마치고
  그 바다같이 잠깐 잠잠한 후
  나발했던 두 손 갈라
  오그려 좌우 두 귀에 대고
  실눈을 감으며 어부는 선다

  바람 또 아우성친다
  물결 또 들였다 친다
  소리 또 뒤흔든다
  바다 또 늠실거린다
  억만 년 전부터 하는 그 장단대로

  하건만 바람소리 모르는 듯
  물결 뛰놈 아니 보는 듯
  모래밭의 회리바람 아니 무서운 듯
  수평선 넘어오는 소식 오직 들으려
  어부는 숨을 죽이고 등걸처럼 선다

  소식 갔는지
  소식 왔는지
  알 길도 없고
  어디로선지 모르게 날아온 백조 한 마리
  안기듯이 발 앞에 풍덩 떨어져 앉는다

  끝없는 바다 끝없는 모래밭
  그칠 줄 모르는 떨리는 교향악
  수평선 지평선 넘겨다보며
  그 서품에 천평선天平線 기대고 서서
  어부는 영원히 영원을 내다보더라..

 

 

(1953년 시집 / 수평선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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