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하늘의 뿌리 / 박정대

하농17 2012. 9. 25. 10:37




 

 

 

그것은 풀리지 않는 욕망의 매듭 같은 것이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려 하늘의 뿌리가 지상에 스며들 때
더러는 꿈속까지 비가 내려
잠든 욕망의 옆구리를 들쑤실 때
애인이여 너를 덮고 잠들던 나의 곤고한 청춘은
한 장의 음화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갈증과 회한이 교차하는 새벽의 문턱에서
삶은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나를 엄습하고 그 결렬한 고독으로부터
나를 건져 올리던 것은
어쩌면 그 아름답고 우울한
한 장의 음화였는지도 모른다

산다는게 어쩌면
낡은 구식 쟁기와 같은 것이어서
이미 경작할 마음의 밭이 없는 나는
늘 죽음 쪽에 가깝고
죽음이 나를 수소문하는 저잣거리에서
나는 추억을 헐값에 팔아 넘겼으므로
홀가분하게 죽음에 자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상의 유리창에 달라붙은 한없이 습기찬 성에처럼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병든 혼의 가혹한 질주
나는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덮고 있는 갈가마귀떼의 하늘을 지나
하나의 가혹한 시간과 공기 속을
나는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구의 자전을 거슬러올라 또 다른 별의
윤회 속으로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의 뿌리여
너는 왜 지상의 강물에 발을 담그는가
넉넉한 대지의 품속으로 뿌리내리던
빗방울들의 육체여 너는 지금 어디를
통과해가고 있는가 밤새도록 비가 내려
그 무슨 격렬한 표현처럼 나를 휩쌀 때
숫처녀와 *하듯 그렇게 오오 나는
하나의 세상을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속도에의 열망 같은 것이
나를 살아가게 하던
이 잔인하고도 황홀한
시간의 늪 속에서

※ 숫처녀와 *하듯 : 앙리 미쇼의 詩『바다와 사막을 지나』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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