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 이기철

하농17 2012. 5. 24. 10:32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된다
우리가 죽을 때 세상의 빛깔은 무슨 색일까
무성하던 식욕은 어디로 갈까
성욕은 어디로 사라질까
추억이 내려놓은 저 형형색색의 길을
누구가 제 신발을 신고 타박타박 걸어갈까
비와 구름과 번개와 검은 밤이 윤회처럼
돌아나간 창을 달고 집들은 서 있다

문은 오늘도 습관처럼 한 가족을 받아들인다
이제 늙어서 햇빛만 쬐고 있는 건물들
길과 정원들은 언제나 예절 바르고
집들은 항상 단정하고 공손하다
그 바깥에 주둔군처럼 머물고 있는 외설스러운 빌딩들과
간판들 인생이라는 수신자 없는 우편 행랑을 지고
내 저 길을 참 오래 걸어왔다

내일은 또 누가 새로운 식욕을 되질하며
저 길을 걸어갈까
앞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지우면서 내 이 길을 걸어왔으니
함께 선 나무보다 혼자 선 나무가 아름다움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내 풍경 속에 천 번은 서 있었으니
생은 왜 혼자 먹는 저녁밥 같은가를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듯하다..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정 스님 1주기 추모 사진  (0) 2012.06.05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0) 2012.05.30
별들을 읽다 / 오태환   (0) 2012.05.21
늘 혹은 때때로..  (0) 2012.05.17
여자가 바라는 것은..   (0) 2012.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