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에서 태백 가는 늦가을 길
허드레 배추밭에서 만난 거의 허물어진 폐가
비어 있는 방 안에 서리어 있던 겨울
바다 썰렁함이 나들이 길 끝까지
발자국 소리처럼 집요하게 따라왔다
태어나면 사라져야 하는 필연의 바람이 들락 거리는
문짝 떨어진 빈 방이 거느리던 쓸쓸한 체념이
굴뚝 연기가 펄펄 찢어지고 있는 다른 세계의 낮선 벽촌에서
지금 엷은 보랏빛 어스럼처럼 깔리고 있는 것을 본다
아득한 밭자락에 서 있는 잎 진 미루나무 잔가지 틈새에 얹혀 있는
빈 까치집이 담고 있던 전생의 해거름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 켜지던 눈물겨운
이승의 불빛처럼 보이기 시작하던 동점(銅店)역 협곡 길
정선은 너무나 오랫동안
틈새 없는 견고한 촉감에 길들여져 있다
내 몸안에 묻혀 있는 비어 있는 눈부신 구석을 보지 못한다
빛이 들어갈 수 없는 밀폐된 진공의 복강에서
그것은 암적색 간장같이 단단하게 보일 수 있다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 찰옥수수 쭉정이가 문진처럼 무거운 것은
정연하게 줄지어 있는 비어 있는 금빛 알맹이 흔적 때문이다
중세의 수도승이 기거했던 마리아 라크 수도원 빈 방이
태고의 저녁 어스름 무게로 가득 차 있는 네모인 것을 보았다
비어 있는 자리는 시가 배경으로 거느리는 침묵의 겨울 숲처럼 아름다웠다
저무는 들판 끝에 서 있는 잎 진 한 그루 자작나무 잔가지 둘레가
눈부신 것처럼 목숨이 떠난 빈자리는 나의 일부다
- 허만하. '비어 있는 자리는 눈부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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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시선은 먼저 어느 폐가의 풍경 속에서
'비어있는 방 안에 서리어 있던 겨울 바다'의 모습과
'태어나면 사라져야 하는 필연의 바람이 들락거리는
문짝 떨어진 빈 방'의 모습을 찾아 낸다
그 모습은 적막하고 쓸쓸하거나 허무하기도 하다
심지어는 죽음의 자취도 어른거린다
빈 방의 모습에서 하필이면 겨울 바다의 썰렁한 분위기나
사라져버리는 바람의 흔적을 찾아내는 시선은
모두 삶의 빈자리가 간직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버려진 옥수수가 무겁다니 무슨 뜻인가?
그 무거움은 깨달음의 무게다
버려진 옥수수에는 알맹이를 파먹은 흔적이 가지런히 남아 있다
알맹이가 비어 있는 자리
그것이 우리에게 무거운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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