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비어 있는 자리는 눈부시다 / 허만하

하농17 2012. 2. 16. 10:47

 

 

 

 

 

정선에서 태백 가는 늦가을 길

허드레 배추밭에서 만난 거의 허물어진 폐가

비어 있는 방 안에 서리어 있던 겨울

바다 썰렁함이 나들이 길 끝까지

발자국 소리처럼 집요하게 따라왔다

 

태어나면 사라져야 하는 필연의 바람이 들락 거리는

문짝 떨어진 빈 방이 거느리던 쓸쓸한 체념이

굴뚝 연기가 펄펄 찢어지고 있는 다른 세계의 낮선 벽촌에서

지금 엷은 보랏빛 어스럼처럼 깔리고 있는 것을 본다

아득한 밭자락에 서 있는 잎 진 미루나무 잔가지 틈새에 얹혀 있는

빈 까치집이 담고 있던 전생의 해거름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 켜지던 눈물겨운

이승의 불빛처럼 보이기 시작하던 동점(銅店)역 협곡 길

정선은 너무나 오랫동안

틈새 없는 견고한 촉감에 길들여져 있다

내 몸안에 묻혀 있는 비어 있는 눈부신 구석을 보지 못한다

빛이 들어갈 수 없는 밀폐된 진공의 복강에서
그것은 암적색 간장같이 단단하게 보일 수 있다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 찰옥수수 쭉정이가 문진처럼 무거운 것은

정연하게 줄지어 있는 비어 있는 금빛 알맹이 흔적 때문이다

중세의 수도승이 기거했던 마리아 라크 수도원 빈 방이

태고의 저녁 어스름 무게로 가득 차 있는 네모인 것을 보았다

비어 있는 자리는 시가 배경으로 거느리는 침묵의 겨울 숲처럼 아름다웠다

저무는 들판 끝에 서 있는 잎 진 한 그루 자작나무 잔가지 둘레가

눈부신 것처럼 목숨이 떠난 빈자리는 나의 일부다


- 허만하. '비어 있는 자리는 눈부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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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선은 먼저 어느 폐가의 풍경 속에서

'비어있는 방 안에 서리어 있던 겨울 바다'의 모습과

'태어나면 사라져야 하는 필연의 바람이 들락거리는

문짝 떨어진 빈 방'의 모습을 찾아 낸다

그 모습은 적막하고 쓸쓸하거나 허무하기도 하다

심지어는 죽음의 자취도 어른거린다

빈 방의 모습에서 하필이면 겨울 바다의 썰렁한 분위기나

사라져버리는 바람의 흔적을 찾아내는 시선은

모두 삶의 빈자리가 간직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버려진 옥수수가 무겁다니 무슨 뜻인가?

그 무거움은 깨달음의 무게다

버려진 옥수수에는 알맹이를 파먹은 흔적이 가지런히 남아 있다

알맹이가 비어 있는 자리

그것이 우리에게 무거운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