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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Queen of Scots

하농17 2019. 11. 17. 10:37






*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의 여왕(1542~1587)

제임스 5세의 외동딸 생후 며칠 후 부왕과 사별 1543년 여왕이 됨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1558년 프랑스 황태자 Francis와 결혼 2년 후 남편과 사별하고 스코틀랜드로 귀환

이때 스코틀랜드에는 Knox와 그 일파가 종교개혁을 도입 가톨릭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여왕은 완충 정책을 썼고 이것은 가톨릭 국민과 교황을 실망시켰다


1565년 사촌 Darnley 경과 재혼 교황의 인가를 얻었다

이 결혼에서 난 아들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이며 영국의 제임스 1세이다

남편 Darnley는 여왕의 비서 David Rizzio를 질투해 그를 암살하도록 선동했고

이 살인은 여왕 부부 사이에 버성김을 초래했고 남편도 Earl of Bothwell에 의해 암살되었다

암살자는 자기 처와 이혼하고 메리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프로테스탄트 예식으로 치러졌고 교황과 대부분의 유럽 궁정의 반대를 받았다

이 결혼 후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여왕을 거슬러 일어나 여왕군을 패배시킨 후 그녀를 Lochleven 성에 감금했다


여왕을 무찌른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프로테스탄트를 국교로 하고 가톨릭을 탄압했다

그후 여왕은 감금 성에서 탈출 다시 군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영국으로 도주했다

여기서도 체포되어 치욕스러운 고발을 당했으나 귀족 의원들은 그녀에 대한 너그러운 판결을 내렸다

이때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그녀에게 화해의 편지를 보냈다

한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메리가 자유로 있는 한 자기 왕관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 그녀를 계속 감금했다

가톨릭 측에서는 메리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정당한 결혼을 하도록 하는 중재안이 나왔으나

북쪽에서의 가톨릭 궐기가 실패에 돌아감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메리는 혹독한 감시 체제에서 14년간 감금되었다가 사형당했다






* 엘리자베스 1세(1558 ~ 1603)

헨리8세와 앤 폴린 사이에 태어난 공주로서 1588년에 영국의 여왕이 되어 1603까지 재위했다

훌륭한 여왕 베스라는 별명으로 국민의 경애를 받은 엘리자베스 1세의 긴 치세 중 영국 절대주의의 극성기를 이룩하였다

또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함으로써 대영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국내에서는 사회변화 즉 봉건제의 쇠퇴에 따라 많은 부랑인과 빈민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응하기 위해 그녀의 만년인 1601년에 구빈법을 제정

엘리자베스 구빈법은 구빈의 국가책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근대적인 구민법이었다

여왕은 교묘한 정치적 역량이 있어 특히 의회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온건책을 아울러 써 이를 조종하였으며

결혼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으나 정치적 종교적 이유 때문에 끝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그의 치적을 열거하면 수장령과 통일령의 제정(1559년) 39개조의 제정에 의한 영국 국교회의 확립

그레샴의 제안에 의한 통화 개혁 무적 함대의 격파(1588년) 모직물 산업 육성 동인도 회사 설립 등을 들 수 있다




            

* 같은 핏줄의 두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절대 왕권적인 위치에 올라섰고 국민들의 사랑도 독차지했으며 제해권마저 손아귀에 쥠으로써

명실공히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게 된 엘리자베스였지만 그녀도 내면적으로는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왕실 혈통 문제인데 이미 헨리 8세의 정치에서 언급되었듯이

엘리자베스의 모친인 앤 왕비가 헨리 8세의 이혼 요청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은

엘리자베스가 헨리의 적자로 남게 하려던 희생적인 행동이었으나

그 이후 헨리는 에드워드 왕자를 보면서 사실 엘리자베스에 대한 적자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국민들에 의해 그녀는 여왕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만약 누군가가 튜더 집안의 혈통상 적자를 따진다면 사실 왕실에 더 가까운 사람은

그녀와 친척 간인 메리 스튜어트 여왕이라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것이 두 여인 사이에 주어진 운명이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로버트 1세가 왕국을 안정시킨 후 그와 후손들인 스튜어트 가문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 교황청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제임스 5세의 사후 메리 스튜어트는 어머니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양육되어 프랑수와 2세와 결혼하였으나

그가 1년 만에 병사하자 프랑스의 왕비의 위치에서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옮기게 되었다.

한편 스코틀랜드는 존 녹스(John Knox, 1505~1572년)란 인물이 장로교도들을 중심으로 교회 국가를 만들고 있었다

존 녹스는 가톨릭 사제였다가 국교도로 개종했고 메리 튜더 시절에 크랜머를 구출하려다 세인트 앤드루 성에 유패된 적도 있으며

이후 제네바에 거주하며 정통 칼뱅파를 신봉한 후 스코틀랜드로 건너와 장로파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다

이러한 상황하에 있던 스코틀랜드에 메리 스튜어트가 막상 여왕으로 부임하게 되자

그녀가 가톨릭 신자이며 프랑스 왕후였음을 들어서 계속 그녀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견디다 못한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를 떠나려 했다

그녀는 프랑스로 갈지 잉글랜드로 갈지 고민하다가 마침 프랑스는 정부가 바뀌는 시점이라 포기하고

그의 친척인 엘리자베스가 있는 잉글랜드를 택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에 온 그녀는 반()엘리자베스 추종파들이 혈통 문제를 부추기는 바람에 이에 말려들어

결국 엘리자베스에 대항하는 반란에 연루되었다.

그 결과 1587년에 참수형을 당하는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는 의지가 메리 스튜어트의 참수로 이어지게 되었음에도 끝까지 이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1603년 죽는 순간까지도 정통적인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내면에는 메리 스튜어트의 존재를 누구보다 의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메리 여왕의 남편들 / 프랑스와 2세, 헨리 단리, 제임스 헵번 보스웰





한 여인의 생애에서 사랑할 가치가 없는 남자에게
너무 일찍 자신을 헌신하는 것보다 더 깊은 추락은 없다

진정한 여성은 자신에 대해서도 상대에 대해서도 그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라고

메리 스튜어트 여왕이 고른 남자

하필이면 사랑할 가치가 없는 남자만 사랑했다

병약해서 요절하거나 잘생겼되 그게 다거나 권력욕만 있는 남자


헨리 8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이야기꺼리를 남긴 왕일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던 왕이기도 하고 6명의 부인과 결혼했으며

그중 2명은 사형대로 보내기도 한 왕 그리고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던 후계자를 얻었으나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 그 후 잉글랜드의 왕권은 항상 불안했다


살아있을때도 이야기꺼리가 많았으나 오히려 죽고 난 뒤

그의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더 많은 이야기꺼리를 만들어 냈다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대영 제국을 세운 엘리자베스 후계자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나자

불안했던 영국 메리보다 먼저 왕위에 올랐지만 9일만에 폐위되고 목숨을 잃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있었고

엘리자베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메리에게 유배당해서 시간을 보내다가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에게도 라이벌이 있었으니 바로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