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고흐와 테오도르 그리고 오베르 마을 / H

하농17 2014. 2. 20. 10:37

 

 

지난 2011년 6월....

그리고 4개월 후인 10월....

두 차례 프랑스를 다녀왔다.

 

" 고통은 영원하다.(La tristesse durera toujours) "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유언을 남기고

힘겹고 고된 생을 마감한 고흐.... .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한 도시 오베르 쉬르 오아즈(Auvers sur Oise)

바로 그 마을이 프랑스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유작인 '까마귀 나는 밀밭'의 그 풍경들이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자마자

파리에서의 번잡하고 초조한 하루를 마치고

이른 아침 바람을 가르며 민박집을 나섰다.

대략 30Km 근교에 위치한 고흐의 마을 오베르를 향해서.... .

 

 

< 6월의 몽마르뜨 >

 

 

당시.. 네델란드 고흐 미술관에 다녀온 후라

그의 삶이 더욱 시리게 다가왔고

그가 마지막을 보냈던 그 마을에 꼭 다녀와야 한다는

이상스러울 정도의 짙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느 날....

마지막 유작인 '까마귀 나는 밀밭'을 그린 그 들로 나가

권총으로 자신의 복부를 쏘았고 3층인 자기 방까지 올라가

이틀 후.. 동생 앞에서 세상을 떠나간 고흐.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고독....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은 상처와 고통....

그것도 부족하여 결국 스스로 자신마져 버린다.

 

마지막까지 고통은 영원하다고 말했던 그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했었다.

 

 

테오에게....


내가 너에게 다시 편지를 쓴다고 하더라도 나쁘게 생각지는 말아라.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 그림 그리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란다.
(15 August 1882)

 

 

< 간밤.. 비가 내렸던 10월 아침의 오베르 시청.. 기차역에서 내리면 보일만큼 가깝다 >

 

 

파리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Pontoise역에서 환승
다시 기차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가면
고흐의 마지막 흔적을 담은 아담한 시골 마을에 도착한다.

 

짙어가던 가을.. 프랑스를 다시 찾은 이유 중 하나였던 '오베르 쉬르 오아즈'.
그 날의 감흥은 평생 내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반 고흐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오베르 마을.
소개한 이름처럼 오아즈 강이 흐르는 이곳은 고흐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살았다고 하기엔 머문 기간이 너무 짧은데
대략 70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 모두 77점의 유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엄청난 열정이었다.

 

당시 유화는 그리고 말리고 다시 덧그리기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한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만 해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70일 동안 77점이라니....
도저히 사람이 해낸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죽기 전에 모든 예술혼을 불태운 것이다.

 

 

< 오베르의 시청(Auvers Town Hall, 1890) >

 

 

그림의 배경과 간단한 설명.. 오베르 곳곳엔 이런 안내시설이 널려 있다

 

실제 그림을 보면....

후기인상주의화가답게 현실의 모습과는 적당한 괴리가 있다.

 

고흐는 프로방스의 생 레미 요양원에서 치료 중
1890년 정신과 의사인 가쉐의 권유로 이곳에 오게 된다.

 

당시.. 모네,세잔,피사로 등등 인상파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던 가쉐 박사는
고흐의 이야기를 듣고 동생 테오도르에게 형을 이곳에 보낼 것을 권유했다.
복잡한 파리보다는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면 분명 정서적으로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자신의 소견 때문이었다.

 

결국.. 테오도르는 정신병원이나 다름없는 요양원에 있던 형이 안스러워 그의 말에 따른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오베르의 풍경과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던 고흐....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그리며 점점 병세가 호전되었던 고흐....

 

그러나 70 여 일 후....
1890년 7월 27일 갑작스레 고흐는 자살해 버렸다.

 

그가 떠났을 때.. 테오도르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무명화가였던 형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까지 않았던 테오도르
당시 그는 제법 평판 있는 갤러리스트 였다.

고흐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결혼을 했고 이후 둘 사이엔 갈등이 자라난다.
이유란.. 아내의 간섭이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흐가 이곳에 머물며 테오의 집에 놀러갔을 때
전에 없던 돈 문제 때문에 크게 다투고 돌아오기도 했었단다.

 

원래 세심한 성격.. 평소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깊은 비관....
그가 자살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유일한 기댈 곳인 테오와의 관계도 틀어졌으니까.

 

하지만 사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정신병원에 있을 때.. 한 평론가가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고 신문에 글을 썼었다고 한다.
그 평을 본 테오가 신이 나서 고흐에게 보냈는데

고흐는 그 비평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나는 보잘 것 없으니 나 말고 보다 우수한 화가들을 위해 좋은 글을 부탁합니다. "

 

얼마 후.. 머물던 여관 주인에게 권총을 빌려 자신의 복부를 쏘았고
다음 날..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그리고 몇 달 뒤.. 테오 역시 폐렴으로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난다.

 

후사가들의 입담처럼 어쩌면 테오는

고흐가 이 세상에 있게 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갔는지도 모른다.

 

묵묵히 형이 지닌 커다란 고독을 받아주던 쓸쓸한 그림자....

말 없는 허수아비로서의 삶을 말이다.

 

 

< 6월의 밀밭.. 충분히 눈 부셨고 목이 메었다 >
 

 

고흐의 마지막 작품 <까마귀 나는 밀밭>의 배경이었던 실제 이 밀밭은
짙고 어두운 하늘 아래 늘어선 그의 그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21 세기를 사는 현대인.. 그들이 맹신하는 과학의 지식을 빌리자면

물체의 위치 에너지가 광속의 운동 에너지로 변할 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나는 비록 짧고도 짧은 찬라였을 망정

분명.. 시간이 멈추었다는 걸 인지했었다.

확연히 경험했었다.

 

이처럼....

시인의 상상력.. 화가의 남다른 시선은

우리 경험의 인식적인 한계를 훌쩍 뛰어 넘어

끝없는 미지의 세계에까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이 세계의 깊은 의미와 다원적 구성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었을 듯싶다.

 

 

< 얼마 후면 그의 그림처럼 온통 금빛으로 물들 밀밭..... . >

 

 

드믄드믄 유영하는 흰구름과 깊고 푸른 하늘....

소슬한 잔바람이 귓가를 휘감아 도는 그 아름다운 밀밭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숨이 멎을 듯한 각별한 고독을 맛보았다.

 

어쩌면 그건 내 생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덮어버릴 만큼의 치열한 고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정말 나는 완벽한 '혼자'였다.

때때로 고독이 고통을 덮어버리기도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안 것이다.

 

그래.. 나는 얼마나 미숙했는지....

얼마나 허황했는지....

누군가의 안타까운 생이 찬란한 금빛으로 머문 거기

실바람 부는 그 밀밭에 아무 욕심 없이 주저앉아

오래도록 빛바랜 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이 혼란한 세상을....

정말.. 어찌 살아내신 겁니까.

 

 

< 무덤 입구로 가는 길.. 저 담 안쪽이 오베르 쉬르 오아즈의 공동묘지다 >

 

 

드넓은 밀밭을 돌아 걸으면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오베르의 공동묘지가 홀연히 나타난다.

 

자신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해준 동생과 나란히 쉬고 있는 모습은
그의 대단한 명성과 달리 지나치게 소박했다.
아니.. 차라리 버려진 페허와 같은 허전함마져도 든다.
하지만 묘하게 고흐와 잘 어우러진다.

 

그래서일까?

난.. 차마 사진을 찍지 못했다.

 

마지막까지도 절절히 고통을 호소했던 그....

이제야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그에게....
불필요한 방해가 된다고 억지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한 구석 조촐하게 자리잡고 있는 고흐와 동생 테오도르의 작고 남루한 묘비....
어떤 미련도.. 어떤 허망한 장식도 없는 그 묘비 앞에는

작은 꽃 몇송이 그리고 한 아이가 남기고 간 편지가 놓여 있었다.

 

기억한다.

나도.. 거기서 네게.. 길고 긴 편지를 쓰고 싶었다.

 

주변의 무덤 대부분은 화려한 대리석으로 덮혀 있었는데
나란히 놓인 고흐와 테오도르의 무덤은
소박하게 나무 덩굴로 덮혀져 있었다.

불운했지만 치열히 살다간 형제의 마지막다운 처연한 풍경이었다.

 

그 무렵.. 내 머리속엔 한가지 숙제가 깊게 남겨졌다.

 

능쌍 헤매고 있는 실존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 숙제가 풀리고 해결되는 날
주저없이 또 이곳을 찾게 될 것이다.

 

고흐.. 아직 그에게

물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으니까.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현대예술 표현주의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가.

거친 화풍과 강렬한 색채가 인상적인 그의 그림에서
정신병으로까지 몰고 간 극심한 고통이 느껴진다.

 

곧 폭풍우가 들이닥칠 듯한 검푸른 하늘....

거친 바람에 온 몸 전체가 흔들리는 노란 밀밭....

그 위를 낮게 나는 검은 까마귀들.... .

 

고흐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이다.

어두운 색조와 침울한 분위기로 가득 찬 '까마귀 나는 밀밭'

 

흔히.. 이 그림을 가리켜 '고흐의 유서'라고 부른다.

죽기 직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권총 자살을 시도한 바로 그 장소에서 그린 그림이라는 것.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밀밭의 전경을 그린 이 그림으로

 나의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림과 함께였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마지막을 대신할 수 있을까?

 

 

어떤 그림 아래로 - 파울 첼란

 

까마귀 뒤덮인
보리밭 물결
어느 하늘의 푸르름인가
아래인가
위인가

 

영혼에서 튕겨 나온
때늦은 화살

보다 강렬한 울림
보다 가까운 타오름
두 개의 세계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이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을 염두에 두고 쓴 시다.

 

파울 첼란은 루마니아 유대계 태생으로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때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부모는 강제수용소에서 죽고 만다.
2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정착했으며 명성을 더해가던 1970년

갑자기 센 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심오하고 혁신적이며 독창적인 시인 중 하나

우리나라에도 그의 시에 심취한 마니아 층이 꽤나 두터운 걸로 알고 있다.
현대시의 고전인 '죽음의 푸가'가 유명하다.

 

젊은날.. 세상이 하수상하던 시절 한때

그의 시에 빠졌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잊고 지낸 그의 시가

그때 갑자기 떠올랐던 건 지금 생각해도 작은 미스테리다.

그의 시와 고흐의 연관성을 찾아낸 건

돌아오고 난 이후.. 궁금증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뜻밖의 결과였으니까 말이다.

 

시든 그림이든....

같은 모티브가 이어주는 심상의 공명 정도로 이해하는 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인듯 싶다.

 

시대를 초월한 인물들의 감성에

내가 응하고 통할 수 있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고 축복이었다.

 

물론..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상상과 비약 그리고 증폭에 따른

억지 논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 우리의 시골길 같던 오베르의 골목길.. 순간 왈칵하고 반가움의 눈물이 났다 >

 

 

6월과 10월....

한 해.. 두 번의 프랑스 방문.... .

 

계절을 가로지른 이 무리한 여행 덕분에 무려 3개월 넘게 라면과 살아야 했으며

한동안.. 그 좋아하는 커피도 줄이고 술도 끊어야 했지만

티끌만큼의 후회도 없었다.

 

돌아보면.. 6월 첫 방문 때.. 특별한 감흥없이 파리를 둘러본 후
다음날 고흐의 흔적이 담긴 오베르 행을 결정했었다.

 

북역에서 출발.. 퐁투와즈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오베르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꽃무늬가 프린트된 린넨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거친 농사일에 코까지 발갛게 익은 동그란 얼굴의 그 아주머니는
내게 꼬깃꼬깃한 팜플렛을 한 장 쥐어주셨다.

 

오베르를 소개하는 관광 소책자였다.
유년의 기억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당신의 고향에 꼭 가보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

 

마지막까지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해 주시던 그 아주머니 덕분에
오베르는 내게 더 더욱 특별한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그후 10월 두 번째 방문....

기차를 타고 50 여 분 후....
슬프도록 한산한 작은 역을 나와 청명한 햇살 아래
마치 모든 사물이 꼴라쥬처럼 명확한 경계선을 지니는 그 작은 마을에서

나는 실로 눈이 아닌 가슴으로 만져지는 행복의 포만감을 다시 느꼈다.

 

뜻밖에도 실존의 문제라는 길고 긴 숙제를 풀었기 때문이었다.

절망과 고통의 심상이 휩쓴 어느 화가의 눈과 가슴으로 재탄생한 소박한 오베르 성당
세상 모든 근심과 아무 상관없는 드넓은 밀밭
그리고 너무 초라해 도히려 더 더욱 경외감이 밀려들던 고흐와 테오의 무덤까지.... .

 

귓가에 스치던 한 줌 바람과 눈물샘을 자극하던 청명한 공기
저절로 고개들던 나뭇잎 사이 그 눈부신 햇살과 푸른 하늘빛
그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고 언제까지나 기억하고픈 마을이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머나 먼 이역의 풍경과 하늘 그리고 수더분한 향기
오베르는 내게.. 그렇게 끝없이 남겨질 것같다.

 

그래서.....

추억은.....

저마다 다르게 적힌다.

 

 

< 묘지의 긴 돌담을 따라 이어진 길.. 묘한 여운 때문에 쉬 떠나지를 못했다 >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고흐는 동생의 품에 안긴 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파란 가득한 삶을 마감했다.

 

7월 30일 고흐는....

테오, 베르나르, 탕기 영감, 가쉐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베르의 묘지에 묻혔다.

 

8월.. 테오는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몽마르트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고흐의 추모전을 열었다.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년 1월 25일

형의 죽음 이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테오가

네덜란드의 우트레히트에서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제는 모두 끝내어도 좋다.

헤겔이 말하지 않았던가.

미네르바의 부엉이도 더 이상은 날지 않는다고..... .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어쩌면 나는 스스로의 간절한 희망과 달리

오로지 이 한 장의 사진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건

내 욕심이 덧없거나 치열했던 고흐의 예술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밀밭가.. 아무렇게나 핀 저 양귀비....

그 진한 꽃잎의 유혹에 기꺼이 나를 내어준 까닭일 거다.

 

실존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온통 역설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가혹했던 운명....

그는 온 생을 통해 경멸 당했고 조롱 받았으며 몰이해의 차가운 시선 속으로 던져졌다.

그래도 그는 그렸다.

그리며 응시했고 깨달았다.

자화상에서 그는 인간을 쫓았고 몰아부쳤다.

끝내 자신을 던져버렸고 극한 감성속에서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치열한 싸움의 결과였다.

 

쏟아지는 빛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시선....

그의 확신....

엄격했던 운명을 향한 비극적이고 보잘것 없으며

결코.. 피할 수 없었던 끔찍한 여정 그의 삶.... .

 

지금 당신은

그의 삶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니 어찌 살고 계십니까?

 

나도.. 당신처럼 어설픈 희망은 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인간을 말하고 비루한 삶을 찾아보겠습니다.

늦었지만 깊은 안식과 무한한 영광을 전하며.... .

 

 


 

James Galway (feat. Cleo Laine) - How, Where, When
Location City: Madrid   Country: Spain

 

 

- 긴 P.S -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와 영화 이야기를 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 오딧세이 다시 봤는데, 오디세우스가 그렇게 빨리 쏘던 활도 느려 보이고....

  어릴 때랑 많이 틀리더라. "

" 왜 그런지 알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다 버려놔서 그런 거야. "

" 왠 개소리? "

" 황야의 무법자 이후.. 클린트의 속사 권총에 익숙해지다 보니 왠만한 건 다 느려 보이는 거지. "

 

그럴싸한 항변이었다.

영화 '오딧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20년의 긴 항해 끝에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와 거지 분장을 하고는

아내인 페넬로페에게 찝쩍거리며 결혼을 강요하는 배신자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만이 시위를 당길 수 있는 강한 활로 순식간에 화살들을 날린다.

 

오디세우스가 화살을 뽑아 쏘는 장면

당시로서는 그렇게 빠르고 멋질 수 없었다.

 

영화속 주인공은 <스팔타카스> <OK목장의 결투> <진홍의 도적>등에 주연을 거친

우리시대 까지도 익숙한 배우 커크 더글러스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유명한 '원초적 본능'의 마이클 더글라스.... .

 

우연이었을까?

 

고흐에 관한 유명한 영화 4편....

그 중.. 제일 먼저 제작된 것은 60년대 영화로

커크 더글라스가 고흐로.. 안소니 퀸이 화가 고갱으로 등장한

'열정의 렙소디' 원제 'Lust for life'였다.

 

지금은 구하기 힘든 이 작품....

핀란드로 떠나오기 전 EBS 명화극장에서 우연히 감상했었다.

얼마 전 다시보기로 볼려고 시도는 해봤는데

저작권 때문인지 외국 아이피라 차단인지

암튼.. 당근 '불가' ㅡ_ㅡ 아까비!

 

 

 

< 2013년 8월.. 오베르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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