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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 점.. 시대를 말한다. (1) / H

하농17 2013. 12. 13. 10:37


          

그림 한 점.. 시대를 말한다 - 1. 겸재 정선 (謙齋 鄭歚 1676년~1759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중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내가 받은 교과서들 중에서 선명한 컬러로 만들어진 책은 모두 두 권이었다.

사회과부도 그리고 미술책..... .

 

그 미술책에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고흐의 '해바라기' 등등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서양의 대표적인 회화작품들이 가득했지만

정작 내 눈길을 끌었던 강렬한 그림은 따로 있었다.

바로..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

 

그림을 잘 모르는 어린 소년의 눈에도

그 그림은 여느 그림들과는 분명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년은 그 그림에 대해 미술 선생님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대답은 참으로 어이 없는 것이었다.

그건.. 시험범위가 아니라는 것.  ㅡ_ㅡ;;

 

나도.. 여러분도.. 아니 우리 모두는 한때 그런 시절을 살았던 것이다.

예술이란 배부른자들이 행하는 쓸모없는 감정의 과소비일 뿐이라며

괄시하고 핍박하던 그런 시절을 말이다.

 

30년이 더 지난 이제

그것이 감정의 과소비든 낭비든 내가 아는 겸재 정선에 대해 조금만 말하고자 한다.

물론.. 아는 바가 조금이기 때문이다. ^^;;

 

 

 

1. 80년 만에 돌아온 화첩

 

지난 2005년으로 기억한다.

대단히 경사로운 사건이 있었다.

 

그동안 독일의 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가

8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화첩이 세간에 화재가 되었던 것.

바로.. 겸재 정선의 화첩이었다.

 

전 이화여대 교수였던 유준영씨..... .

그는 우연히 해외에서 정선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낡은 사진 세장을 발견하였고

각고의 노력과 결심 끝에 추적에 나선다.

그리고 그 사진의 발원지인 낯선 이국의 땅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던 정선의 화첩을 끝내 찾아내어

고국에 알린 최초의 발견인이었다.

 

 

< 독일 바이에른의 쌍트 오틸리엔 수도원 - 출처 '왜관수도원' >

 

 

그렇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 화첩에는

국보급 그림인 겸재 정선의 작품 21점이 담겨 있었다. 

 

이후.. "한국인의 영혼을 돌려주십시오" ..라던

선지훈 신부의 끈질긴 부탁과 설득 그리고 인내의 작업 덕에

결국.. 정선의 화첩은 영구임대 형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는 문화제 반납의 대단히 모범적인 선례가 되었으며

특히.. 소더비 경매 쪽으로부터 엄청난 거액을 제시받은 상태에서

더 이상 스스로 이 대단한 유물을 지키고 보관하기 어려워졌음을 생각할 때

대단한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준 훌륭한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큰 용단을 내려준 독일 수도원 측에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예를 표한다.

아울러 유준영 씨와 선지훈 신부에게도 각별한 감사의 뜻을 전한다.  (__*)

 

잠시 사족을 달자면

지금까지 국외로부터 환수된 반출 문화재는 총 132건.

그 중.. 정부의 협상으로 돌려받은 건 꼴랑 11건에 불과하고

대부부 이같은 민간 차원의 환수였다.

무려 열 두 배나 많은 숫자.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대략 15만 여 건.

이를 되찾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야 어차피 이제 전혀 기대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정부 따위와 아무 상관없이

민간 차원의 꾸준한 노력과 진실된 바램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 겸재 화첩 반환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것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사랑이 왜 절실한지

다시 한번 깊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암튼.. 그렇게 돌아온 화첩의 그림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그림은

'금강내산전도'

금강산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그린 산수화다.

 

 

 

 

이 작은 사진으로는 직접 확인이 어렵겠지만 

자세히 보면 금강산의 크고 작은 사찰을 비롯해

산속의 주요 건축물들까지 세세히 담고 있는 이 그림은

흔히 일만 이천봉이라 칭하는 금강산의 위용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2. 겸재 정선..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잘 알려진 바처럼

겸재 정선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담아낸 산

그것은 금강산이었다.

 

 

< 국보 217호 금강전도 - 정선 >

 

 

그런 금강산의 여러 계곡 중 최고의 절경이라면

단연 '만폭동(萬瀑洞)' 계곡을 꼽는다.

 

수 많은 폭포가 어울려 소를 만들고

여러 물줄기가 어울려 다시 계곡을 만드는데

그 모습이 제각각 달라 만폭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선은 이처럼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그런 그에게 금강산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수 많은 아름다운 봉우리와 골짜기들

거기 특별한 기암괴석으로 인해

사계절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금강산....

그것은 조선의 긍지와 주체성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선은 평생토록 여러번 만폭동을 그렸다. 

그의 그림속에서 만폭동은

너럭바위 양쪽에서 폭포가 만나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 만폭동 - 정선 >

 

 

나이가 들어 화풍이 무르익으면서 부터는

절제와 변형 또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과감하게 생략하는가 하면

때로는 골짜기의 아주 작은 암자까지 그려넣어

전체와 구분의 조화를 완성시켜 나갔던 것.

 

실제로 금강산을 보고 정선의 금강산을 보면

훨씬 더 금강산 같아 놀랐다는 선인들의 이야기가

그저 허허로운 낭설만은 아닐듯 싶다.

 

내 생각에도 실제 금강산이 정선의 금강산만 못하다. ^^;;

 

 

< 금강대 - 정선 >

 

 

이런 풍경이라면

그리고 그 풍경을 고스란히 담은 정선의 그림이라면

당연히 시 한 수 쯤 나와야 응당하다.

 

重上金剛臺(중상금강대) 금강대에서..... .

靜觀 一禪(정관 일선, 1533~1608)

 

高臺靜坐不成眠(고대정좌불성면) 높은 누각에 조용히 앉아 잠 못 이루는 밤
寂寂孤燈壁裏懸(적적고등벽리현) 외로운 등잔불 벽에 걸려 적적한데
時有好風吹戶外(시유호풍취호외) 문 밖에는 시절 좇아 좋은 바람 부는 소리
却聞松子落庭前(각문송자락정전) 뜰 앞에는 도리어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3. 겸재 그림의 핵심

 

실제 금강산보다 더 금강산 같아 보였던 그의 그림.....

 

사실.. 이것이 정선의 진경화가 가지는 놀라운 현상이자 핵심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의 본질을 그림으로 명확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서양의 극사실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금강산을 그린 그림만 하더라도

겸재는 평생에 걸쳐 여러 차례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였고
모두 100 여 폭에 이르는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비슷한 구도의 금강전도(金剛全圖)를 많이 그렸다.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넓게 구도를 잡고
뾰족한 암봉은 예리한 필선을 쭉쭉 그어내리는 수직준법(垂直皴法)으로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은 큰점들을 횡으로 찍는 미점준(米點皴)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토산이 암산을 감싸 안은 듯한 이런 구성은

한때 음양(陰陽)의 원리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결국 이러한 형식과 묘법은 금강산도의 전형으로 인식되어

후배 화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18세기 당시 금강산 탐승(探勝)의 열풍으로 인해 많이 그려진 이런 금강전도류는
종례엔 후학들의 회화적 지도서 혹은 안내서의 역할까지 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자~!!

그런데 겸재는 왜 이런 화법을 좋아했고

특히 금강산 그림에 유독 사용했을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지도 모른다.

당시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한눈에 다 볼 수 없던 금강산.....

정선은 그 구석구석의 아름다움까지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애썼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진경산수와 부감법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을 앞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었던 정선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그리기 위해 형체만 그리지 않고

전체와 조화속에서 그 정신까지 살려냈다.

 

전체를 그리지만 부분부분을 잊지 않았고

사물을 그리지만 그속에 깃든 정신까지 담아냈다는 말이다.

 

 

 

4. 내연산 삼용추.. 드디어 '겸재준'이 만개하다.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겸재..... .

 

지금의 북악산 아래 위치한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정선은 그곳에서 태어나 52세까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림이 천대 받던 시절.. 대부분의 화가는 노비나 중인이었지만

정선은 달랐다.

 

퇴계 이황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선 성리학의 계승자로서

이미 유학에 능통한 사대부였다.

그림속에 자신의 의지와 시대상을 투영시키기에 충분한 자질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된다. 

 

그 증거가 당시의 서책속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관아재고'를 비롯한 당시의 여러 서책 속에서도

그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이미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던 것.

(주 - 관아재고()

 

 

< 말 징박기 - 조용석 >

 

 

태백산맥이 동해와 만나는 곳인 포항 내연산....

12개 폭포를 품은 절경으로 유명하다.

그곳 용추계곡 연산폭포 아래 바위에는 특별한 글자가 새겨져 지금까지 남아있다.

 

'갑인추 정선'

1733년 가을 정선이 이곳에 왔다. ..는 뜻이다.

 

당시.. 청하 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겸재는 이 지역을 두루 돌아보며 많은 그림을 남겼다.

 

 

< 내연산삼용추도 - 겸재 정선 >

그 대표작이

내연산삼용추도(內延山三龍湫圖)다.

 

정선은 특유의 힘차면서도 율동적인 붓놀림으로 

내연산 삼용추의 절경을 그려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들을

원숙한 필치로 재구성할 수 있었던 정선....

그것이 바로 이른바 '겸재준'이다.

 

그래서 내연산 용추골은

우리나라 진경산수화의 화풍이 활짝 피어

그 절정에 이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에 그림에 입문한 이후

자신만의 화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정선은

말년에 이르러 드디어 독창적인 화법을 완성했던 것이다.

 

대상의 윤곽과 질감 중량감을 독창적인 기법으로 표현해

각각의 사물에 깃든 의미와 기상까지 표현하는   

이른바 '겸재준' 법.

 

그것은 그동안 만연했던 중국풍의 화법에서 벗어나

우리산하를 우리만의 기법으로 표현하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우리 것에 대한 재해석과 민족적인 긍지....

이런 것들이 융합되어 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비로서 가지게 된 것이다

 

즉.. 이전에 그림들은

그것이 조선의 것인지 중국의 것인지 쉬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선 이후

드디어 독자적인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우리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누가 보더라도.. 중국인이 봐도.. 일본인이 봐도....

'이것은 조선의 그림이다.' ..라고 할만한

분명한 화법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우리의 문자를 가지기 시작한 것과 비견할 만한

문화적 대약진이었다.

 

 

 

5. '진경'의 진정한 의미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평론서인

'근역서화징' 에서 조차

겸재는 우리의 진경산수에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겸재가 그리고자 했던 진경의 의미는 무엇일까?

 

 

< 인왕산 매바위와 서울의 야경 >

 

 

산세가 아름답고 기암괴석이 많은 인왕산은

오랫동안 산수화의 단골 소재였다.

당연히 수 많은 화가들이 인왕산을 그렸다.

 

그러나 가로 138.2㎝에 세로 79.2㎝로 비교적 대작인 정선의 인왕산 그림은

분명 실제와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仁王齊色圖) >

 

 

< 비 개인 인왕산 >

 

 

진경산수를 그리는 그가 왜 다르게 그렸을까?

그리고 그런 정선의 진경산수란 정확히 무엇일까?

 

산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인왕산

당연히 바위들은 흰색을 띠며 그동안 그렇게 그려져 왔다.

 

오래도록 중국의 화법을 따랐던 전통적 화법에서 흰바위는

가는 윤곽선 안에 갇힌 단순한 여백 정도로 표현되어 왔던 것.

한마디로 강렬한 힘이 없는.. 그저 공간을 차지하는 구성품 정도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조선 전기의 그림으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 조선 전기의 대표작 '안견'의 '몽유도원도' 테두리 안에 갇힌 바위의 형상들은 기괴하고 몽환적이다.

   그러나 그에 반해 묵직한 중량감과 강렬한 기상은 부족하다. >

 

 

그러나 말년의 정선이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에 살며 바라 본 인왕산은 분명 달랐다.

비록 흰바위지만 강렬한 기상과 웅지를 품고 있는 명산이었다.

게다가 제색도의 제색(齊色)이란 의미는 엄숙할 제(齊)를 사용하였으니

비가 오고난 후 바위가 젖은 상태의 묵직하고 고요하며 엄정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종례의 방법으로는

인왕산이 지닌 힘차고 웅장한 기세.. 게다가 비에 젖은 웅온한 자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정선..... .

 

드디어.. 인왕산 바위를 검게 칠하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변화를 구사한다. 

 

흰바위를 검게 표현해서

원래의 흰바위.. 즉 직접 본 흰바위가 가지는 강렬한 힘을

더더욱 강렬히 표출하려 애썼던 것이다.

그렇게 바꿔야만 그 형질이 좀 더 명확히 드러나기에

과감히 흰색을 검은색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중국쪽 화풍을 따르던 당시로선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용기이자 결단력이었다.

 

거대한 바위가 가진 중압감과 위압감을 그대로 살려

우리 산세의 기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겸재의 독창적인 선택......

그것이 바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 중심의 화풍에서 벗어나

조선의 정신마져 그림에 담고자 노력했던 정선의 프론티어적인 시대정신이자

독보적인 자부심이었다. 

 

 

 

6.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림을 설명하고 그림을 보러가는 당위성을 설명할 때

묘지가 가장 애용하는 문장이 있다.

 

원래 누구의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아버지께 들었기에 당연히 내 아버지의 언어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사람들은 왜 미술관을 찾아요?"

"미술관.. 그곳에는 그림이 있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들.....

 그들의 삶과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분명..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들을 찾아 듣고 또 스스로 알아가며

우리는 그림과 더더욱 친숙해지고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겸재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인왕제색도'

이 시대를 초월한 걸작에도 당연히 이야기가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

보다시피 온통 진한 묵으로 그려졌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단 한번이라도 수묵화를 그려 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붓으로 저렇게 그리려면 붓을 옆으로 뉘어 빗자루처럼 쓸어내리듯 그려야 한다.

그것을 보통 묵찰법(묵색 쇄찰법)이라고 한다.

깎아지른 절벽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벽준과 비슷하지만

막상 그려놓고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

그런 묵찰법을 한번이 아닌 몇 번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 그렸기에

바위의 묵중한 중량감이 더더욱 살아났다.

 

게다가 원래의 백색암석을 진한 묵으로 그려 놓았음에도

본래의 색은 백색임을 느낄 수 있게 하였으니

말년의 겸재가 지닌 묵법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쉬 알 수 있다.

 

하지만 인왕산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면

저 백색바위가 결코 백색으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바위가 비에 젖으면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솟구친 백색 화강암봉들의 독특한 색감은

이런 묵색 쇄찰법으로 쓸어내려야만 그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겸재는 인왕산 밑자락 인곡정사에 살면서

이미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의 연습과 실험에서 터득하였을 것이다.

그 노력만으로도 가히 진경산수의 백미로 꼽힐만한 표현법이다.

 

뿐만 아니라 버드나무, 소나무 등 갖가지 나무의 표현 역시

세밀한 기교와 표현을 배재한 채 속도감 있게 그려내서

거친듯하지만 한결 기품 있고 장대한 우리 수목의 특징을 살려

조선의 산하에 어울리는 진경산수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 양 옆과 특히 인왕산 정상의 윗부분을 의도적으로 과감하게 잘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왕산의 웅장함이 좁은 종이에서 벗어나

더 높게 뻗어나갈 수 있는 상상의 여지를 충분히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처음부터 의도된 건 아니었다.
원래 이 그림의 상단에는 순조때 영의정까지 지낸 만포 심환지(1730~1802)의

칠언절구 제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겸재 그림을 대단히 좋아하여 그림을 소장하면서 제시를 적어두었는데

워낙 검소해서 그런지 죽어서 초상화 하나 마련하지 못하여

심환지 후손들이 초상화 대신 그림에 적힌 조상의 글씨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돌았을 것이고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며

적어둔 제시는 없어졌고 그때 그림의 상단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는 것.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신기하게도 감상자의 시선이 어느덧 자연스레 우측 앞에 있는 조그마한 집으로 모아진다.

그림을 감상할 때 시선이 모아진다는 것

그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분명.. 화가가 치밀하게 계산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 그림의 주제이자 목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저 집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찬찬히 그림을 보자.

 

어떤가?

저 집이 그림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보면

분명 그림이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아무튼 저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이었을까?

 

그 오랜 의문의 단초를 마련한 분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최완수 선생이었는데

최완수 선생은 이 그림을 그린 때가 적힌 작품관지에서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 즉 '신미년 윤달 5월 하순'에 그려졌다는 것에 착안한다.

그리고 정선의 60년 지기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5월 29일에 죽었다는 것 또한 밝혀낸다.

 

그 후.. 오주석 교수가 [승정원일기]를 통해 이 병연 사망 전후의 날씨를 확인한 바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줄 곳 비가 내렸고

25일 오후에 비로소 비가 완전히 개었다는 걸 확인했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이 병연이 죽기 4일 전인 25일

비가 개인 오후에 그렸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고

오랜 의문에 쌓여있던 저 그림속 기와집은

육상궁 뒷담 쪽에 있던 사천 이병연의 집(취록헌)임을 고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겸재는 왜?

자신의 그림에 이병연의 집을 그려 넣었을까?

 

사실.. 사천 이병연은 정선의 둘도 없는 벗이었다. 

정선이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거장이었다면

사천은 무려 일만 삼천 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문장가이자 진경 시인이었다.

둘은 10대부터 스승인 김창흡 아래 동문수학한 죽마고우였던 것.

 

각각 81세,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한동네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애틋했던지 겸재가 양천(지금의 서울 가양동) 현령으로 부임할 때

이병연의 전별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그림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진 보이누나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왕망천(당나라 문인이자 서화가 왕유) 

 

 

한양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

그야말로 엎드리면 코 닿는 거리의 양천으로 떠나는 것임에도

이렇게 애절한 시를 남겼다니..... .

 

그러고도 둘은 전별시와 더불어 또 시와 그림을 주고받기로 굳게 약속한다.

 

 

겸재와 더불어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이 있어서

기약대로 가고옴을 시작한다.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봄에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둘러 대니

누가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신유 봄에 사천(槎川)
 

 

이렇게 주고받은 시와 그림을 묶어 놓은 서화첩이

바로.. 그 유명한 [경교명승첩]이다.

[경교명승첩]은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보여주는 조선 최고의 서화첩이다.

그곳에 서로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한 점 있는데

바로.. <시화상간도(詩畵相看圖)>

 

 

<<시화상간도> [경교명승첩]中  1740~41, 비단에 담채, 29 x 26.4 cm, 간송미술관

 

사천과 겸재가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 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서로를 바로보는 표정만으로도 오랫동안 함께했던 지기라는 걸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그렇게 겸재 자신의 피붙이와 다름없는 벗 사천이

이제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겸재는 60여 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가 막히고 절절히 아팟을까?

 

온통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며

하루빨리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나길 손모아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인왕제색도>에는 그런 겸재의 마음이 절절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맺어준 벗 사천 이병연이 어두운 비구름이 개이듯 어서 병이 나아

저 당당한 인왕산처럼 다시금 웅장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려낸 필생의 그림인 것이다.

 

집 주위를 건장한 수목들이 호위하듯 빙 둘러 그려낸 것만 보아도

사천이 병마를 이겨내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겸재의 속마음을 잘 알 수 있다.

 

속도감 있게 그린 수목이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수목을 그려

적당히 뭉크러져 보이는데

이것 또한 물기가 촉촉한 수목을 표현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기법이었다.

 

겸재의 <인왕제색도>에서

마치 절망 끝에 피어나는 카타르시스의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오는 까닭은

이처럼 지극한 마음을 담아 혼신의 힘으로 염원하듯 그린

그의 예술혼과 인간미가 살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처럼 <인왕제색도>는 지금의 궁정동 칠궁 담장 너머에 있던

사천의 집(취록헌)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것이다.

그래서 백악산 아래에 있는 사천댁 취록헌만 있으면 되었고

그 건너 인왕산 아래에 있는 겸재 자신의 집 인곡정사와

그 사이에 많은 집들은 큰 의미가 없기에 안개 밑으로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앞 등성이에 육상궁 뒷담을 표현해 이쪽이 북악산록이란 표시만 보더라도

궁정동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절절한 사연과 함께

겸재는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기량을 이 그림에 다 쏟아 부었다.

 

묵색쇄찰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사천 이병연을 상징하듯 바위를 중량감 넘치게 그렸고

그러자니 토산과 먼 곳의 수목은 단조로운 피마준과 미점만으로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양성곽의 모습까지 세심하고 정성들여 그려넣어

전체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한 점 흠잡을 데가 없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이 탄생한 것이다.

 

그림 한 점..... .

그것은 시대를 이야기 하고

한 사람의 삶과 인생을 이야기 한다.

 

 

 

7. 겸재.. 그는 우리의 그림을 선물했다.

 

이제까지 겸제 이전의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만들어 낸 교과서적인 방법에 기초해 그렸을 뿐이었다.

아니.. 흉내내고 답습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우리 산천의 세밀한 아름다움과 다양함은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선은 금강산을 비롯해 한양 주변 그리고 영남지방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직접 보고 그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그리며 보다 명확한 표현.. 보다 아름다운 표현을 위해

스스로 선구자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창연하기까지한 숭고한 길이었고 거룩한 길이었다.

 

그런 정선의 그림이기에

비로서 우리는 정선에 이르러

조선의 산수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선.. 그가 있어....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그림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의 긍지와 자랑인 '수제천'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간단한 해설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

 

 

PS - 이어지는 사진 두 장으로 간단히 ps를 정리하겠다.